“나는 하나님의 의를 싫어했다. 나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죄인들을 벌주시는 분으로 배웠다. 내가 비록 신실한 수도사로서 살았지만, 언제나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무거운 양심의 가책 속에 있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자비로움으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는 말씀을 밤낮으로 명상하면서 말씀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진력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복음을 믿음으로 부여받아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새로 거듭나서 열린 문들을 통하여 낙원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부터 ‘하나님의 의’는 낙원으로 인도하는 가장 달콤한 단어로 찬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서 전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마르틴 루터, 라틴어 저작 서문 중)
1517년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대해 저술한 위의 글을 보면, 종교개혁의 씨앗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발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는 거룩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수 요소인데, 의(義)라는 한자를 분석해보면 羊(양)이란 단어가 我(나)라는 단어와 하나가 되어 위에 서 있는 모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는 말씀처럼, 양은 죄 없고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에 진정한 의는 내 위에 예수 그리스도가 세워져 악한 나 대신 거룩하신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참된 의인은 자신의 의가 아닌, 예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나타내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마태복음 21장에서 부정한 짐승인 나귀가 거룩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때 예수님이 그 위에 타심으로 부정한 나귀의 모습이 아닌,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나귀를 환영하는 모습과 일치됩니다. 그때 만일 나귀가 혼자 들어갔다면 그 자신이 가진 어떤 것으로도 그러한 대접은 받을 수 없습니다.
중세 로마카톨릭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크게 오해한 채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우리 자신의 의를 준비해서 들고 가도록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가인의 제사와도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도 마찬가지였기에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1~3)
종교개혁의 가장 기본이 되는 핵심은 인간의 의에서 하나님의 의로의 전환입니다. 오늘날도 두 가지 의의 길이 있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의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의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혹은 아직도 중간 위치에서 혼돈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