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갈 4:17)
성경에는 ‘열심’이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열심이고, 다른 하나는 피조물인 인간의 열심입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에 대해 가장 많이 혼동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열심과 인간의 열심에 대한 구분입니다.
열심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것’ 입니다. 즉, 열심은 어떤 일을 이루고자 온 정성과 마음을 쏟는 것인데 문제는 열심을 가진 당사자의 능력입니다. 사실 열심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누구의 열심인가?’ 입니다.
한 인터넷 신문의 정치 논평 기사에서
“무서운 것은 무능한 사람이 열심 내는 것이다. 무능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낫다.”는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는 무능하면서 열심을 내면 오히려 일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실 때 홀로 창조하셨습니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 44:24)
하나님은 왜 홀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을까요? 모두가 알듯이 우주는 그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대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광대한 우주가 지구에 생명체를 보존시키는데 있어서는 지극히 세미하게 조정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광대한 영역에 관해 정밀과학이 가르쳐준 모든 사실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과는 전혀 무관하게 독립적인 어떤 확실한 질서가 압도하고 있다. 드러난 증거로 보아 인간과 자연은 우주의 지성적 질서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막스 플랑크, 현대 물리학의 창시자)
뉴턴 이후 물리학 최대 발견인 ‘양자역학’을 입증하며, 아인슈타인과 함께 현대 물리학을 선도한 막스 플랑크의 고백처럼 우주에는 지성적 질서가 있는데, 최근에는 그 질서가 너무나 놀랍도록 미세하게 조정되어 조금만 달라져도 우주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즉, 지구와 태양의 크기, 지구와 태양의 거리, 지구와 달의 중력, 지구 대기층의 유무, 지구의 공기와 물의 유무 등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생명의 조건들 외에도 양성자의 질량, 전기력의 힘 등 아주 세미한 조건들까지 모두 생명체를 위해 미세하게 조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이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생존에 초점을 맞추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광대한 우주를 정밀하게 창조하는 일을 할 만한 존재는 당신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홀로 창조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피조물의 어떤 도움 없이도 온 우주 만물을 완벽히 창조하셨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 2:1)는 말씀처럼, 우주 만물은 어떤 실수도 없이 완벽히 만들어졌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계 4:11)
그런데 하나님의 온전하신 능력을 부정하고 영광을 가로채고자 하는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다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온 우주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인 루시퍼 역시 창조 되었을 때는 아래와 같이 완전한 존재였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겔 28:12)
문제는 루시퍼가 교만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존재가 된 것이지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데도, 자신도 하나님처럼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다는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했다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체 하였으니”(겔 28:5,6)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5)
그 마음이 거짓의 시초이자 최초의 불의로 모든 악과 불행의 근원입니다. 만일 루시퍼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자신의 온전함을 믿고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면, 그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교만은 불의를 낳았고, 그 불의가 자기 열심을 만들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2~14)
위와 같이 루시퍼는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진리를 무시한 채 자기 열심을 따라 스스로 뭔가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 열심은 자기를 세우고자 하는 악한 열심으로, 하나님을 대적할뿐더러 결국 자신도 망하게 만드는 불행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 14:15)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겔 28:16)
그런데 안타깝게도 루시퍼의 교만이 그의 불행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도 루시퍼의 교만이 심겨졌고, 루시퍼와 동일하게 하나님에 의해서만 행복할 수 있다는 진리를 외면한 채 자기 열심을 따라 스스로 자기를 위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경계거리가 되고”(겔 28:19)
하나님은 루시퍼를 쫓아내시며 루시퍼를 아는 사람은 루시퍼를 경계거리로 삼을 것이라고 하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루시퍼에 대해 몰랐기에 경계하지 못한 체 속은 것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후손인 인류 역시 루시퍼의 교만에 사로잡혀 불행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즉,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열심과 은혜 안에서 쉬는 행복한 삶을 얻기 전까지는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며 자기 스스로 열심을 내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열심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에게도 스며든 것입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 22:3)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빌 3:6)
사도 바울은 위와 같이 과거에 자신이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열심을 냈던 사람이었지만, 그 열심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음을 고백했습니다. 당시에는 자기 열심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1~3)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 참 신앙을 얻은 후 전에는 믿음으로 보았던 인간의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열심과 의를 대적하며 결국 멸망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위와 같이 구원 받지 못한 유대인들이 자기 열심의 거짓된 믿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열심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해줍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고후 11:2)
하나님의 열심으로 열심 낸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는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왕하 19:31)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열심과 일하심에 초점을 맞춘 믿음의 열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대한 이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자기 열심으로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했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열심으로 구하려다가 실패했던 40세의 모세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해결된 것을 보면서 위와 같이 말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쉼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 보는 마음으로 문제를 대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후 15:15)
그리고 결국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친히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로서 예수님을 통해 얻을 수 있음을 설교석상에서 아래와 같이 자주 강조했습니다.
“모든 것들은 열심이 선두에 서서 이끌어야 합니다. 이 열심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 활력이 성령의 지속적인 역사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열심을 외투처럼 입고 계셨습니다. 그분을 태우고 달려갔던 사명이라는 마차의 바퀴는 얼마나 빨랐는지요! 그 열심을 얻기를 바랍니다.”(찰스 스펄전, 1857년 11월 22일 집회설교 중)
“하나님의 열심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 열심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길로 가게 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우리의 겨울은 끝나고 태양이 비치며, 우리 마음은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납니다.”(찰스 스펄전 설교집 중, 1914. 11. 12 출판)
마지막 때 교회 모습이라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런 열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열심이 없으면 차가운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열심을 사모해야 되는데, 미지근한 상태에 만족하며 머물러 있었기에 참된 신앙을 얻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래와 같이 강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16~20)